2001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폴란드는 실롱스크 지역의 두 교회를 세계유산에 등재할 것을 제의했고, 독일이 이 제의를 강하게 지지했습니다. 제의가 받아들여지며 유럽에서 가장 큰 목골 구조의 두 교회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두 교회는 건설되기까지의 역사, 장부의 완벽한 이음매, 다색의 내부 마감장식 등 모든 면에서 놀랍습니다. 유명한 오르간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교회 안에 꼭 들어가 봐야 합니다. 실롱스크 지역에 드문 개신교 공동체가 여전히 두 교회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현재의 독일 지역에서 17세기에 발생한 종교·정치 분쟁은 1648년 실롱스크 지역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막을 내렸습니다. 스웨덴의 지지를 얻은 실롱스크 개신교인들은 협상을 통해 새로운 교회 세 곳을 지을 권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이 이전에 빼앗긴 교회는 반환되지 않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Ferdinand) 황제는 그워구프(Głogów), 시비드니차, 야보르에 각각 교회를 세울 것을 허가했는데, 그중 그워구프에 세워진 교회가 1758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두 교회만 남아 있습니다.
조약의 조항에 따르면 새로운 개신교 교회는 전형적인 건축물이 되지 않아야 했고, 방어 기능을 갖추지 못하도록 지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나 점토처럼 내구성이 약한 재료로 지어져야 했고, 도시 밖에 위치해야 했으며, 탑이나 종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교회 건설 비용은 가난한 개신교인들이 충당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1707년에 알트란슈테트(Altranstädt) 조약을 통해 종탑을 짓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실롱스크 지역의 전체 개신교인 수에 비해 지을 수 있는 교회가 세 곳뿐이라는 것은 너무 적은 수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 개신교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브로츠와프(Wrocław) 출신의 건축가 알브레히트 폰 제비슈(Albrecht von Saebisch)는 유례 없이 거대한 목골 교회를 지었습니다. 야보르의 교회는 1654년부터 1655년까지, 시비드니차의 교회는 1656년부터 1658년까지 지어졌는데, 각각의 면적은 1,180제곱미터와 1090제곱미터, 수용 인원은 5,500명과 7,500명이었습니다. 신자들이 들어갈 공간은 여러 층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간소한 형태의 내부는 교회가 완공된 후 10년 동안 각종 그림으로 꾸며졌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은 물론 바로크풍 식물형 장식, 실롱스크 문장(紋章), 귀족의 생활 등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시비드니차 교회의 그림은 크리스토프 칼리츠키(Christoph Kalicki)와 크리스티안 쥐센바흐(Christian Süßenbach)가, 야보르 교회의 그림은 게오르크 플레겔(Georg Flegel)이 그렸습니다.
두 교회를 장식하는 예술품 대부분은 실롱스크에 위치한 작업장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작업에 참여한 개신교인 중 유명한 인물로는 브제크(Brzeg) 출신의 크리스토프 클로제(Christoph Klose), 옐레니아구라(Jelenia Góra) 출신의 판크라티우스 베르너(Pankratius Werner), 레그니차(Legnica) 출신의 마테우스 크노테(Matthäus Knote)와 요제프 호페리히터(Josef Hoferichter)가 있습니다. 설교단과 제단을 만든 고트프리트 아우구스트 호프만(Gottfried August Hoffman)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비드니차 사람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두 교회는 혼자 둘러볼 수도 있고, 전문 가이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부득이한 경우 요청하면 테이프 녹음 안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약간의 입장료가 있습니다.
시비드니차 교회의 오르간은 좋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특히 유명합니다. 2000년부터 시비드니차 평화의 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바흐 축제에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작곡한 음악이 연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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