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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시치를 세운, 오늘날의 표현대로라면 개발한 인물은 얀 사리우시 자모이스키(Jan Sariusz Zamoyski)였습니다. 자모이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의 귀족이자 고위 관리였는데, 세계 역사상 아주 부유했던 인물로 손꼽힙니다. 적어도 빌 게이츠의 두 배에 달하는 구매력을 지녔고 아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자모이스키는 꿈을 실현할 능력이 충분했습니다. 자모이스키는 당대에 거의 최고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나르도 모란도(Bernardo Morando)를 고용해 도면을 작성하고 건설 작업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1540년경에 태어난 모란도는 1569년부터 폴란드에서 일하는 중이었고, 자모시치 개발에 참여하기로 계약하기 전에 이미 바토리(Batory) 왕과 여러 폴란드 귀족을 위해 작업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모이스키의 재능에 관한 소소한 사례로 자모시치 건설이 시작되던 해에 준비된 극장 장식 계획을 들 수 있습니다. 자모이스키의 동문이었던 얀 코하노프스키(Jan Kochanowski)이 ‘그리스 사절단의 후퇴(The Send-Away of the Greek Envoys)’이라는 비극을 썼고, 이 작품이 자모이스키와 크리스티나(Krystyna)의 결혼식에서 공연되었습니다. 그때 자모이스키의 재산은 훨씬 더 늘어났는데, 지참금을 가져온 신부의 가문이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라지비우(Radziwiłł) 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란도가 지은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덕분에 자모이스키와 모란도가 1578년 7월 1일에 리비우(Lviv)에서 서명한 계약서는 다행히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브로츠와프(Wrocław)의 오솔리네움(Ossolineum) 도서관에서 이 계약서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자모이스키가 1580년 4월 10일에 야로스와비에츠(Jarosławiec)에서 발행한 도시 자치권 문서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본인, 본인의 가족, 친구뿐 아니라 지역 전체의 공익과 안전”을 고려하여 세워진 대단한 건축물들이 현재도 도시에 남아 있습니다. 궁전, 시청, 무기고, 참사회 성당, 주택 등 모든 건물이 같은 건축가, 모란도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자모시치의 건축물에는 이 지역 특유의 예술적 요소뿐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 네덜란드 북부, 아르메니아 동부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모시치 주택 건물들의 특징으로는 아케이드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자모시치에서는 개방형 아케이드와 블라인드 아케이드, 매끄러운 아케이드와 ‘보니아(bonia, 벽에 포함되는 요소로 직사각형 형태가 많음. 전면 외벽, 받침대, 벽 모퉁이, 홀 프레임, 기둥 등을 덮을 때 사용)’ 장식이 달린 아케이드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아케이드는 매너리즘, 바로크, 초기 낭만주의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모란도와 자모이스키에게는 언제나 일보다 사람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자모시치는 완벽히 계획된 도시였고, 재계 상류층이 거주하는 도시였으며, 다양한 문화 출신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도시였습니다. 폴란드인은 물론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그리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스코틀랜드인이 자모시치에 와서 살았습니다.

자모시치에 있으면 폴란드 최고의 과학자, 상인, 군인 들은 완벽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폴란드의 다른 지역이 파괴되어도 자모시치는 승리한 경우가 있었다는 점에서 모란도가 역량을 최고로 발휘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1648년에는 한때 폴란드의 관리였던 보흐단 흐미엘니츠키(Bohdan Chmielnicki)의 군대와 그를 따르는 의용군이 자모시치를 공격했지만, 결국 도시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물러섰고 배상금까지 지불했습니다. 1656년에는 폴란드의 거의 모든 도시가, 심지어 크라쿠프마저 항복을 했는데도 자모시치와 야스나구라(Jasna Góra)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에는 비록 자모시치가 외국군에 점령당하기는 했지만, 러시아인들이 확장하고 강화한 자모시치 요새는 여전히 폴란드를 위해 굳게 버텼습니다. 1830년 11월 봉기에서 자모시치는 봉기군이 항복하기 전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훗날 자모시치 방어 시설은 크게 파괴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부분만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모란도는 작업에 대한 보수를 크게 받았습니다. 자모이스키는 모란도를 자모시치의 첫 시장이 되게 했습니다. 모란도는 자모시치에서 카타지나(Katarzyna)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여 아이를 여섯 명 낳았고, 자신이 설계한 우아한 참사회 성당에 가족과 함께 묻혔습니다. 모란도가 묻힌 성당은 현재 대성당이 되었습니다.

같이 보기:

    자모시치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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