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라실은 포들라시에(Podlaskie)주 비아위스토크(Białystok)군에 속한 도시입니다. 또한 수프라실은 수프라실자치구의 중심 도시로, 비아위스토크 도시권에 포함됩니다. 수프라실강이 통과하는 이 도시는 크니신(Knyszyn) 숲 자연공원 한가운데의 비아위스토크 고원에 위치합니다. 야생 그대로의 아름다운 자연을 지닌 수프라실은 먼지와 배기가스 농도가 전국 평균보다 한참 낮습니다. 또한 수프라실은 온천 도시로서 더없이 좋은 온화한 기후를 나타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1501년, 그루데크(Gródek)의 수도사들이 며칠 동안의 기도를 끝내고 나서 나무 십자가와 성유물을 강에 흘려보내며 이 물건들이 수도원을 짓기에 가장 적합한 곳에서 멈추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고 합니다. 수프라실 수도원과 수프라실강 사이의 거리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십자가와 명판이 있습니다. 그루데크의 정교회 수도원은 수히 흐루트(Suchy Hrud) 숲으로 옮겨졌는데, 이 수도원은 노보그로드(Novogrod)의 통치자였던 알렉산데르 호트키에비츠(Aleksander Chodkiewicz)가 설립하고 주로 후원했으며 나중에는 스몰렌스크(Smolensk)의 정교회 주교 유제프 소우탄(Józef Sołtan)이 지원했습니다. 1504년에는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Aleksander Jagiellończyk) 왕이, 1509년에는 지그문트 스타리(Zygmunt Stary) 왕이 칙령을 내려 호트키에비츠가 세운 수도원 일대에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그 결과 먼저 복음사가 요한 성당이 나무로 지어졌고, 곧이어 수도원 식당과 은둔처가 만들어졌습니다. 수프라실 수도원의 중요성을 부각하고자 설립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축성식을 요청했고, 실제로 1505년에 총대주교가 축성식을 집전했습니다. 1516년에 다른 성당이 또 축성을 받았고 이후로도 수도원 건물이 더 지어졌는데, 그중에는 지하 묘지가 아주 돋보이는 고딕 양식의 ‘부활 성당’도 있었습니다. 16세기에 이 수도원은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1582년에는 오흐리드의 가브리엘 총대주교가, 159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예레미아 2세 총대주교가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수도사들은 11~12세기의 귀중한 인쇄본과 수프라스키 코덱스(Kodeks supraski)를 비롯한 필사본 장서 들을 다량 수집했습니다. 1609년에 수도원은 군사적 위협 때문에 1596년에 결정된 브레스트 합일(Union of Brest)을 따라야 했으며, 그로 인해 귀일교회의 문화·종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807년까지 수프라실은 귀일교회 소속 교구였다가, 러시아 당국이 수프라실 수도원을 정교회 수도사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이 수도사들은 독일군이 다가오자 수프라실의 성모 그림을 들고 러시아 내륙으로 피신했고, 버림받은 수도원은 가톨릭 소속으로 넘어갔습니다. 1945년에 수도원은 떠나는 독일군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고, 종전 후에는 남은 수도원 건물이 농업 학교로 사용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수프라실 수도원은 최종적으로 정교회 소속이 되었습니다. 2004년에 옛 수도원 터에 들어선 수프라실 아카데미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프라실이 19세기 전반에 자치권을 얻었으나 수프라실과 가까운 비아위스토크가 발전하는 바람에 그 중요성이 퇴색된 면이 있습니다. 수프라실은 2002년에 온천 도시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수프라실에 매장된 진흙의 효능은 잘 연구되어 기록으로 남겨져 왔으며, 유럽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수프라실의 온천 시설은 병원에 기초한 환경 속에서 결핵 환자 치료와 연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관리들이 온천 시설을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외부인도 수프라실의 온천을 찾아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또한 수프라실은 휴가와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수프라실에 법으로 지정된 스파 치료 시설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