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노우이시치에는 서포모제(Zachodniopomorksie)주에 속한 온천 도시로, 주의 북서부, 시비나(Świna)강이 발트해로 흘러드는 해변에 위치합니다. 도시에 속하는 섬 중 우즈남(Uznam), 볼린(Wolin), 카르시부르(Karsibór) 섬에 주민이 거주하며, 세 섬은 교통으로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비노우이시치에의 해양 기후는 온화한 편이고, 도시를 둘러싼 숲과 공원이 기후를 부드럽게 합니다. 시비노우이시치에의 스파 리조트에서는 이런 기후에 더해 브롬화물, 아이오딘, 소듐이 풍부한 천연 온천수와 진흙을 주로 이용해 요법을 실시합니다.
고고학 증거에 따르면 시비노우이시치에 땅에 인간이 정착하기 시작한 지는 5천 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이 지역이 기록에 최초로 언급된 시기는 12세기입니다. 불과 천여 년 전에 이 시비나강 유역은 볼린족의 땅이었으나 곧 미에슈코 1세(Mieszko I)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이후에 시비노우이시치에는 포메라니아 공국에 편입되어 강 양편에 방어 시설이 세워졌는데, 방어 시설은 12세기에 덴마크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습니다. 1185년부터 1227년까지 시비노우이시치에를 비롯한 서포모제 전역은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628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시비나강 관문’을 점령하여 발트해에서 시비나강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방어 시설을 세웠지만, 겨우 2년 뒤에는 스웨덴군이 우즈남 섬에 발을 디뎠으며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가 카르시부르 섬에 5일간 머물렀습니다. 1648년에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시비노우이시치에를 비롯한 서포모제 전역이 스웨덴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720년에는 프로이센이 금으로 1,000만 탈러를 지불해 우즈남 섬과 볼린 섬을 매입했습니다.
19세기에는 항구가 대대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목조 잔교가 건설되고, 선박이 드나드는 물길이 더 깊어지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등대를 지을 부지가 마련되면서 더욱 안전한 항해가 가능해졌습니다. 정기 여객선이 운행되기 시작했고, 19세기 말에는 베를린까지 직접 연결되는 철도가 생기면서 시비노우이시치에의 발전이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시비노우이시치에의 온천 역사는 넓게 보면 1822년 목욕 협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 초에 해수욕이 유행이 되고, 특별히 설계된 목욕 시설에서 더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면 효험을 본다는 점이 밝혀지자 시비노우이시치에의 인기가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여름에 시비노우이시에의 바닷물은 발트해 해안의 다른 지역 바닷물에 비해 온도가 높았습니다. 원래부터 넓은 해변과 얕은 바다에는 휴가객이 몰려들었습니다. 1897년에 온천이 발견되면서 시비노우이시치에가 온천 휴양지로 운영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 갖추어졌고, 일 년 내내 운영되는 휴양지에 온천 시설이 더 늘어나자 시비노우이시치에는 훨씬 더 유명해졌습니다. 철도와 항로와 일반 도로의 연결망이 폭넓게 조성되고 상태가 좋은 숙박 시설과 각종 부대 시설이 생겨나 도시가 더욱 발전했습니다. 시비노우이시치에는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에 독일의 최대 온천 휴양지가 되었습니다. 전쟁 후에는 시비노우이시치에가 소련군에 점령되었다가 1958년에야 폴란드에 편입되었습니다.
현재 시비노우이시치에의 스파 리조트에서는 심장·피부·폐 질환, 류머티즘, 근골격계·호흡계·순환계 질환, 유방 절제 후유증, 비만 등을 전문적으로 치료합니다.
오늘날 훌륭한 해변 온천 휴양지가 된 시비노우이시에에서는 환자와 일반 관광객 모두를 위한 요양소, 자연의학 센터, 다양한 숙박 시설이 운영됩니다. 또한 안목이 매우 높은 관광객도 만족할 만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데, 원형극장과 야외 공연장과 해변 산책로에서 국제 음악제와 연극제를 비롯한 다양한 축제가 진행됩니다. 육지와 바다를 막론한 스포츠 등 레저 활동을 위한 시설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이킹을 하고 자전거나 카약을 타면 몸을 단련하는 동시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을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다방면으로 폭넓은 투자를 받고 있는 시비노우이시치에는 앞으로 유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휴양지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