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친예지오르나는 마조프셰(Mazowieckie)주 피아세츠노(Piaseczno)군에 속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폴란드 수도인 바르샤바(Warszawa)에서 남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바르샤바 도시권에 포함됩니다. 1969년에 스콜리무프콘스탄친(Skolimów-Konstancin)과 예지오르나, 그리고 두 도시 주변의 마을들이 합쳐져 탄생한 콘스탄친예지오르나는 현재 같은 이름을 지닌 자치구의 중심 도시입니다. 바르샤바 평원 경계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비스와(Wisła)강 중류, 그리고 예지오르카(Jeziorka)강과 그 지류인 마와(Mała)강이 흐릅니다. 도시의 남쪽과 동쪽은 호이누프(Chojnów) 숲 자연공원과, 북쪽은 카바티(Kabaty) 숲 천연보호구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도시 내 여러 지역에도 숲이 넓게 분포합니다. 호이누프 자연공원은 콘스탄친예지오르나 남쪽에 위치한 오보리(Obory) 경사지, 오보리 수변림, 리친(Lyczyn) 숲 등 서로 떨어진 여러 수림 천연보호구역까지 뻗어 있습니다.
예지오르나 마을은 중세 시대에 세워졌습니다. 18세기에는 “예지오르나에 가고 싶나?”라고 묻거나 “예지오르나에 상소”하겠다는 말이 결투를 신청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왕립 법원이 관할하는 구역에서 결투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결투하려는 사람들은 관할을 벗어난 예지오르카강 건너편에서 만나 싸움을 벌였습니다.
적어도 1730년 이전에 예지오르나 둑길에 물레방아가 세워졌고, 1775년에는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 왕의 주문으로 그 자리에서 하류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제지 공장이 세워졌습니다. 이 제지 공장은 지역에서 최초이고 폴란드 전체 제지 공장 중에서도 매우 오래된 편입니다. 이 왕립 제지 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는 아주 중요하게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1791년 5월 3일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데에 쓰였습니다. 1830년에 공장 전체는 폴란드 중앙은행 소유가 되어 유가증권 발행에 필요한 종이를 생산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예지오르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전쟁 발발 후에 약 절반이 독일군에게 잡혀 바르샤바 게토에 함께 수용되었습니다.
스콜리무프콘스탄친의 이름은 포툴리츠키-스쿠제프스키(Potulicki-Skórzewski) 가문의 콘스탄츠야(Konstancja) 공작 부인에게 유래합니다. 가문이 소유한 오보리 일대의 땅은 19세기 말에 한꺼번에 팔렸습니다. 바르샤바 ‘왕의 길’ 가까이에 위치하고 빌라누프(Wilanów) 협궤철도에 연결된 바르샤바 인근 숲 지대에는 여름 별장이 다수 지어졌고, 그 결과 스콜리무프콘스탄친은 꾸준히 발전했습니다. 1920년대까지 콘스탄친에는 하수도가 갖추어지고 전기가 공급되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콘스탄친은 바르샤바 문화 상류층의 본거지로 알려졌습니다. 현재도 여러 유명한 사업가, 예술가, 외교관, 기자 등이 콘스탄친에 집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콘스탄친예지오르나는 마조프셰주 유일의 온천 휴양지로, 저지대 온천 휴양지에 해당합니다. 넓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온화한 기후를 나타내며 일 년 중 맑은 날이 많습니다. 적당한 기후 조건과 효능이 있는 온천수에 힘입어 1917년에 콘스탄친예지오르나가 온천 도시로 공식 지정되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지질 조사와 온천 시추가 새로 이루어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온천 도시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친예지오르나 스파 리조트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인 염수 농축 탑을 비롯한 야외 흡입 시설은 호흡기 질환 치료에 도움이 됩니다. 이 시설들은 1979년에 완성되었고, 연구 결과 이 시설들에서 나오는 분무의 염분 농도가 유사한 다른 시설에 비해 높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한편 콘스탄친예지오르나에서는 뇌졸중, 외상성 뇌손상, 심근경색, 만성 순환계·근골격계 질환을 앓았거나 심장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위한 치료도 실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