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도바즈드루이는 돌니실롱스크(Dolnośląskie)주 크워츠코(Kłodzko)군에 속한 온천 도시입니다. 해발고도가 200~400미터인 이 도시는 산록 지대 온천 휴양지에 해당하며, 이 도시를 지나는 비스트라(Bystra) 개천은 메투예(Metuje)강과 엘베(Elbe)강에 차례대로 흘러든 뒤 결국 북해에 도달합니다. 도시에 아주 가까운 스토워베(Stołowe)산맥과 레빈스키(Lewiński) 고원 경사지는 북풍과 북동풍을 막아 주는 자연 장벽 역할을 합니다. 그 대신 쿠도바가 남쪽으로는 열려 있기 때문에 쿠도바의 기후는 크워츠코 계곡의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매우 혹은 적당히 온화한 정도로 유지됩니다. 가문비나무, 소나무, 너도밤나무로 주로 이루어진 도시 인근의 넓은 자연림도 기후를 누그러뜨립니다. 쿠도바의 스파 리조트는 지역 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온천수를 요법에 중요하게 이용합니다.
쿠도바는 1354년에 기록에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현재 쿠도바 땅에 있던 마을에는 원래 체코인이 살았으며, 이 마을은 리폴리토프(Lipolitov)라 불렸다가 나중에 후도바(Chudoba)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쿠도바의 온천은 1580년에 최초로 기록되었고, 온천의 효능은 1625년 엘루리우스(Aelurius)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언급되었습니다. 쿠도바의 온천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1636년으로, 이때 목조 목욕 시설이 지어졌습니다. 1777년에는 브로츠와프(Wrocław)에 유통된 ‘실롱스크 지역 온천 휴양지와 온천수 정보 안내’라는 안내 책자에 쿠도바가 중요하게 언급되었습니다. 브로츠와프 출신의 저명한 의사 겸 화학자인 고트프리트 모르겐베서(Gottfried Morgenbesser)가 1774년에 출간한 독일어 책자를 다비트 포겔(David Vogel)이 번역한 이 책에는 온천수 분석 결과, 온천수의 화학 조성, 그리고 온천수를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 실려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쿠도바는 독일에서 심장 치료를 선도하는 지역으로 알려졌고, 1905년에 크워츠코에서 쿠도바를 지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연결되는 철도가 개통되며 쿠도바가 더욱 개발되었습니다. 쿠도바에는 고급 치료 시설, 클럽과 식당, 카페, 별장과 게스트하우스가 세워졌고, 이로써 매력이 한층 커진 도시에 방문객이 더 모여들었습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쓴 전쟁이 다행히 쿠도바를 비껴간 덕분에 쿠도바의 모든 건물은 온전히 보존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을 두고 논쟁이 벌어질 때 쿠도바가 어느 국가에 귀속될지에 대해서도 충돌이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쿠도바 일대에 장갑열차를 보내며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결국 쿠도바는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쿠도바에 살던 독일 출신 주민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쿠도바에 자치권도 부여되었습니다. 종전 후에 거의 바로 쿠도바의 온천 단지가 다시 문을 열었고, 1960년대에 도시 인프라가 확충되며 시설이 개량되었습니다. 현재 쿠도바는 관광과 휴양의 명소로 자리매김한 상태이며, 다른 모든 현대식 스파 리조트와 마찬가지로 쿠도바의 건강 시설과 휴양 시설도 점점 결합되고 있습니다.
현재 쿠도바의 스파 리조트에서는 혈액 질환, 정형외과 외상, 심혈관계 질환, 류머티즘 질환, 소화계 질환, 비만 등을 치료하며, 어린이를 위한 재활 치료도 실시합니다.
쿠도바의 주요 관광 명소로는 2002년에 문을 연 광천수 음용실이 있는 스파 공원, 체름나(Czermna) 지구에 위치한 해골 성당이 있습니다. 현재 유럽에는 해골로 내부가 장식된 성당이 단 여섯 곳 있는데, 그중 쿠도바의 해골 성당에는 30년 전쟁과 역병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해골이 가득합니다. 쿠도바에서 출발하면 스토워베(Stołowe)산맥과 밤비에쥐체(Wambierzyce) 준대성전은 물론, 쿠도바에서 불과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체코의 프라하(Praha)도 당일치기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