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니차즈드루이는 마워폴스카(Małopolskie)주 노비송츠(Nowy Sącz)군에 속합니다. 산악 온천 휴양지에 해당하는 이 도시는 베스키드 송데츠키(Beskid Sądecki)산맥의 크리니찬카(Kryniczanka) 개천과 그 지류들이 흐르는 계곡 일대에 위치하며, 도시 주위에는 파르코바(Parkowa), 크시조바(Krzyżowa), 야시에니크(Jasiennik) 등의 산이 솟아 있습니다. 도시는 아고산 기후를 나타내며, 도시를 둘러싼 무성한 숲이 기후를 누그러뜨립니다. 크리니차의 스파 리조트는 이런 기후에 더해 온천수와 진흙을 요법에 중요하게 이용합니다.
현재 크리니차 땅에 마을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547년으로, 당시 마을은 크라쿠프(Kraków) 주교의 영지였던 소위 ‘무시나(Muszyna) 자치국’에 속했습니다. 1793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슈틱스 폰 자운베르겐(Franz Stix von Saunbergen)이 온천 단지를 건설하고자 크리니차의 땅 일부와 온천을 매입했습니다. 온천수의 효능이 철저히 조사되며 크리니차는 성장했고, 1856년에 유제프 디에틀(Józef Dietl) 교수가 크리니차에 온 뒤 시설들이 급속히 확장되었습니다. 1877년에 크리니차에는 치료소 열한 곳과 개인 전문 병원 예순네 곳이 있었으며 이 시설들은 비슷한 시기에 발족한 온천 협회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에 크리니차를 꾸준히 방문하는 환자 수는 매년 6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즈음 루돌프 추베르(Rudolf Zuber) 교수는 크리니차에서 온천수를 발견했으며 연구를 통해 이 온천수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효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1911년에는 크리니차에 철도가 연결되어 방문하는 환자 수가 더 늘었고, 도시에 자치권이 부여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크리니차를 찾는 방문객 수가 매년 약 38,000명에 이르렀는데, 훗날 네덜란드 여왕이 된 율리아나(Juliana) 공주와 그의 부군 베른하르트(Bernhard) 공이 크리니차에서 신혼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1월까지는 크리니차가 독일에 점령되었는데,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크리니차의 거의 모든 시설을 파괴했고 뒤이어 크리니차에 들어온 소련군마저 얼마 남지 않은 시설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19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크리니차는 다시 휴양지로 기능했습니다.
오늘날 크리니차의 스파 리조트는 여성 질환, 비뇨계·소화계·심혈관계 질환, 심장병, 내분비계 및 신진대사 이상, 근골격계 질환, 불안장애, 빈혈을 전문적으로 치료합니다. 또한 일부 시설은 부인과 질환과 비뇨계·근골격계·소화계·호흡계 질환, 당뇨병, 비만 등을 앓은 환자의 재활에 집중합니다.
크리니차에서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오락과 휴식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향수(鄕愁)에 젖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폴란드 유일의 ‘스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는 크리니차만큼 적합한 곳이 없습니다. 크리니차는 예술 애호가를 위한 곳이기도 한데, 로마누프카(Romanówka) 별장에는 크리니차의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았던 니키포르(Nikifor)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크리니차는 활발히 움직이기 좋아하는 분에게도 만족스러운 곳입니다. 여름에는 테니스 코트, 수영장, 여러 난이도의 자전거 코스와 아름다운 하이킹 코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 스키, 터보건을 즐길 수 있습니다. 특히 날씨에 상관없이 언제나 이용 가능하도록 각별히 관리되는 터보건 트랙도 있습니다. 스타리 돔 즈드로요비(Stary Dom Zdrojowy, ‘옛 온천의 집’)의 무도회장, 중앙 광천수 음용실의 음악당, 산책로 등의 장소에서는 모두를 위한 음악회와 전시회, 예술 관련 모임이 열립니다. 파르코바산 정상에는 1937년에 개통된 강삭철도를 타고 올라갈 수 있으며, 야보지나(Jaworzyna)산 정상에는 1997년부터 운영된 곤돌라를 타고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곤돌라는 해발고도 1,114미터 지점까지 시간당 1,200명을 수송합니다. 이런 시설에 대한 투자를 통해 크리니차는 지역의 겨울 스포츠 중심지로 거듭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