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인물이었던 헤르만 루트비히 하인리히 폰 퓌클러-무스카우(Hermann Ludwig Heinrich von Pückler-Muskau) 후작이 만든 무자코프스키(무스카우어) 공원은 독일의 바트 무스카우(Bad Muskau)와 폴란드의 웽크니차(Łęknica)에 걸쳐 있습니다. 이 자연공원은 19세기 유럽 조경의 가장 뛰어난 성취로 여겨집니다.
무자코프스키 공원은 나이세(Neisse)강 양편에 걸쳐 있고, 공원 근처에는 웽크니차-바트무스카우 국경 검문소가 있습니다. 공원 중 독일에 속한 부분은 약 200헥타르, 폴란드에 속한 부분은 약 500헥타르입니다. 독일 부분이 더 좁고, 폴란드 부분에 비해 도시적으로 발달한 편입니다.
1815년 5월 1일, 무스카우 영지를 소유한 지 4년이 된 30세의 헤르만 폰 퓌클러 후작은 무스카우 주민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나이세강이 흐르는 우크 무자코바(Łuk Mużakowa, 독일어로는 무스카우어 팔텐보겐(Muskauer Faltenbogen)) 종퇴석 지대의 아름다운 지역에 자연공원을 만들고자 한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주민들에게 먼저 알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특이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퓌클러 후작의 공원은 자연, 문화, 기술, 영혼이 이상적으로 연결되는 공간이 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퓌클러 후작은 영국식 정원에 영감을 얻어 가문 영지를 독특한 공원용지로 바꾸었습니다. 공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골짜기와 여러 비탈이나 높은 언덕에 세워진 궁전 건물들 사이에 정교하게 조성되었고, 건축적으로나 식물군 구성으로나 화려한 정원이 공원 곳곳에 배치되었습니다. 유명한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슁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공원 건물 일부를 설계했습니다. 화가 아우구스트 쉬르머(August Schirmer), 영국 조경사 존 에이디 렙턴(John Adey Repton) 등 다른 예술가와 설계가도 공원의 최종 형태를 만드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공원이 그림 같은 풍경을 나타내도록 강의 지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817년 봄에는 교목 80만 그루와 관목 4만 2천 그루를 심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나이세강의 경로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공원의 구상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변 마을 전체가 옮겨졌습니다. 공원을 조성할 자금을 대기 위해 후작은 나이 많은 부유한 여성과 결혼했고, 급기야 몇 년 뒤에는 형식상 이혼을 하고 나서 공원의 유지 비용을 충당할 만큼 재산이 많은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1822년 후로는 후작이 직접 4천 탈러를 투입했음에도 결국 재정이 부족해서 계획이 모두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아주 좋아한 이 별난 후작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공공연히 말했고, 직접 책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책은 1834년에 출판된 ‘조경에 대하여(Thoughts on Landscape Gardening)’인데, 이 안내서는 프로이센 바깥에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작은 여행을 아주 많이 했고,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여행기는 열렬히 읽혔습니다. 대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도 읽은 그의 여행기는 독일 문학의 귀중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회규범에 반기를 들었던 후작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녔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내 정원을 알아야 하네.
정원이 곧 내 마음이니.”
씀씀이가 컸던 퓌클러 후작은 1840년대 중반에 파산하기 직전에 이르렀고, 결국 공원을 네덜란드의 프레데릭(Frederik) 후작에게 매각했습니다. 공원의 원래 주인의 생각을 지지한 새 주인은 공원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마지막으로 공원을 소유한 폰 아르님(von Arnim) 백작 가문은 공원 중심부를 천연보호구역으로 만들었습니다.
퓌클러 후작은 삶의 마지막까지 별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후작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산으로 녹인 뒤 브라니츠(Branitz) 성 정원의 피라미드형 꽃밭에 뿌려 달라고 했는데, 당시에 화장이 불법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871년 2월 4일에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난 퓌클러 후작은 실제로 그곳에 묻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이 새로 정해지면서 무자코프스키 공원은 두 국가에 걸쳐 있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폴란드와 독일 당국이 공원 재생 계획을 시작한 일은 양국이 문화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협력하여 결실을 맺은 특별한 사례로 남았습니다. 무자코프스키 공원은 2004년 7월 2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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